중국의 명장 곽거병
곽거병
중국 전한 시대의 명장.
가히 위청과 함께 한무제의 양검 중 하나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
중국 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 중 한 명이며
그 활동 시기는 고작 18세부터 24세까지,
즉 단 6년 간의 활약으로
수많은 장군들과 지략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곽거병의 활동시기는 한무제 시대 때였는데
다름 아닌 무제의 처조카로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위치에 있었다.
사실 곽거병의 본래 가문은 그렇게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다.
곽거병의 어머니는 위소아(衛少兒)이고, 위소아의 어머니는 위온(衛媼)이었는데
이 여자는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무제는 부인인 아교(阿嬌)와 본래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는 아교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교는 질투심이 심했고 심지어 의부증 증세까지 보여
한무제는 아교에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지고 만다.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는 이런 상황이 난감했는데,
그녀와 한무제의 어머니인 왕부인은 자식을 네 명 낳았지만
아들은 하나,
한무제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괜찮은 여자들을 계속 소개시켜 주지만
한무제는 엉뚱한 태도만 보였다.
그렇게 평양공주 집을 들락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평양공주의 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찮은 여가수 위자부였던 것이다.
마음에 든 한무제는 그녀를 궁정으로 데려왔고,
위자부가 곧 존귀해지면서 위자부의 언니이자 곽거병의 어머니인
위소아도 자연히 위치가 높아졌다.
곽거병이 어느정도 철이 들 무렵에는 이미 고귀한 신분이 되어있었던 것.
곽거병은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자칫 거만해 보일 수 있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한무제의 마음에 들어 그의 시중이 되었다.
곽거병이 18살이 되었을 무렵,
위청은 한무제의 조서를 받고 곽거병을
표요교위(剽姚校尉)에 삼고 흉노 공격에 동행을 시켰다.
여기까지 모습을 보면 한무제가 아끼는 처조카에게 적당히 공을 세울 기회를 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때의 전투에서 곽거병은 기병 800여 명을 거느리고 본대를 떠나
수백 리를 진격 하는 폭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보통 이러면 각개격파당하고 포위당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오히려 곽거병은 2천여 명 이상의 흉노를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흉노 선우의 할아버지 뻘 되는 자약후 산(藉若侯)을 죽이고
선우의 막내 숙부 나고를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이 싸움의 공이 전해지자 무제는 기다렸다는듯이
군에서 으뜸의 공이라고 치켜세워주며 1600호를 내려주고
곽거병을 관군후(冠軍侯)에 삼았다.
(관군후의 위치는 지금으로 본다면 사단장 ★~★★급의 작위.)
다시 말하지만 이때가 18살,
처음 출정 때의 일이다.
3년 후,
곽거병에게 있어 한 없이 빛나던 시기였다.
이해 봄에 무제는 곽거병을 표기장군에 임명했는데,
초대 표기장군이 바로 곽거병이다.
이때 곽거병은 21살이었다.
군부에 몸을 담은지 고작 3년.
더 무서운 건 2년 뒤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은 녹봉으로 오른다는 사실.
그러나 곽거병에 대한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그후에 그가 벌이는 막대한 공을 생각하면 오히려 타당할 지경이었다.
표기장군이 되기가 무섭게 농서(陇西)에서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출정한 곽거병은
오려산(烏戾山)을 넘고 호노하(狐奴河)를 건너며,
엿새동안 다섯 부족을 지나며 무려 1천리를 나아가 백병전을 벌이며
이를 모두 격퇴,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참수했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무리가 무려 8천여 명이 넘었다.
또한 흉노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쓰던 금인(金人)까지 탈취해왔다.
이때 세운 공훈으로 곽거병은 2,000호를 더 받고 3,600호가 되었다 .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
한무제는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공손오를 북지에서 출발시키고,
다른 쪽으로는 장건과 이광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략코자 하였다.
이광은 4천여 명, 장건은 1만여 명으로
도합 1만 4천의 병력은 흉노의 계략에 빠져 수만 대군에게 포위 당했는데,
이광은 홀로 분전해서 4천여 명 가운데 2천여 명이 전사했지만
버티게 되고 장건이 도착하자 간신히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장건은 늦게 도착한 탓에 참형을 받을 처지가 되지만
속죄금을 내서 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양상은 북지에서 출발한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곽거병은 이미 흉노 땅 깊숙히 진격을 하였지만
뒤따르던 공손오가 길을 잃어 한참을 지체하게 된다.
연락이 끊겨 언제 도착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곽거병은 그야말로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데,
공손오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흉노 땅 한복판으로 진격을 했던 것이다.
곽거병은 거연수(居延水)를 배를 타고 건넌 후,
소월지(小月氏)까지 나아가 기련산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추도왕과 2500여 명을 사로잡았고 3만여 명이 넘는 적들을 참수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흉노의 왕 중 다섯 명과,
그 다섯 명의 어머니, 선우에 연지, 왕자, 상국에
장군, 당호, 도위 등을 수백여 명을 사로잡았고,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분쇄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곽거병은 5000호를 더 받게 되었고 8,600호가 되었다.
곽거병을 따라왔던 조파노(趙破奴) 같은 장수들도 짭짤한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공손오는 참형을 당할뻔한 걸 속죄금을 내어 간신히 목숨만은 건지게 된다.
흉노의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서
계속 한나라의 군대에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곽거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혼야왕을 죽이려 했다.
혼야왕은 휴저왕과 논의를 하고, 곽거병을 이길 자신도 없고 선우도 무섭고 하니
차라리 한나라에 투항해버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무제는 이 소식을 들었지만, 만약 항복하는 척하면서 공격을 하면
큰 피해가 우려되었기에 이 일을 곽거병에게 맡겼다.
곽거병은 군대를 이끌고 혼야왕의 부대와 대치했는데,
혼야왕의 비장들 중에 항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8천여 명을 죽이고 수만여 명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 공에 "한무제는 근심거리가 없어졌다." 라며
그를 크게 치하하고 1,700호를 더해주었다.
이 모든 전투가 단 1년만에 거둔 전공이다.
이때 곽거병의 유명한 일화로
한 무제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귀하디 귀한 술을 하사했다고 한다.
사막의 전쟁터에서 그것을 받은 곽거병은 망설임 없이 오아시스에 그 귀한 술을 뿌리고
그 오아시스의 물을 마시면서
"이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라 황제께서 우리에게 하사하신 술이다.
다함께 이 술을 마시고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자" 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감동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년 뒤,
한무제는 장수들을 불러 의논을 했는데
흉노 쪽에서는 한나라군이 보급 등 여러가지 문제로 사막을 건너서는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합의를 두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봄,
한나라는 믿는 도끼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수십만이나 되는 보병과 치중병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흉노 전쟁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무장들은 모조리 참전했다.
기린아 곽거병의 마지막 불꽃,
그 유명한 막북 전투의 시작이었다.
근 10만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기 시작했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다.
출발하는데 있어서,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출발 직전에 포로를 문초해본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군(代郡)에서 출발하여
우주를 뚫을 기세로 진격했다.
그 이후,
흉노 선우의 근신인 장거(章渠)를 사로잡고 왕호 비거기(比耆)를 참살했다.
흉노 좌대장의 군대와 싸워 물리치고 그들이 쓰는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산과 강을 건너 흉노의 왕 3명을 죽이고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을 83명 이상 주살하였다.
그렇게 죽이고 사로잡은 흉노의 숫자가 무려 7만4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흉노 땅 한복판에서 거창하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흉노는 이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본국에서의 보급은 요원하고, 흉노 땅에 딱히 거두어서 쓸만한 논과 밭 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의문증이 들 수가 있는데,
이 해결법이라는것이 정말 어이가 없는 수준이다.
흉노 적군을 때려부수고 흉노 군사가 먹는 것을 빼앗아서 보급을 해결했다고 한다.
말이야 쉽지 전투력이 저들보다 떨어지면 오히려 시도하다 패배하고,
결국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무모하면서도 대단한 싸움이었다.
이렇게 힘든 싸움이었던 만큼, 곽거병의 밑에 있던 부하 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많은 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가 않았다.
곽거병 또한 한번에 5,800호를 증봉받았다.
이때가 곽거병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다.
이토록 미래가 밝고 걸림돌이 없던 곽거병 이었지만
2년후,
24살의 젊은 영웅 곽거병은 돌연 사망하고 만다.
전장에서 죽은 것도 아니다.
죽음의 원인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조차 없다.
그 원인은 아직까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가장 유력한 설로는 전쟁 중 오염된 물을 마셔
죽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의견이다.
곽거병의 죽음을 들은 한무제는
너무나 놀라고 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무제가 그를 위해 성대한 장례를 치른 뒤
자신의 능묘 옆에 매장했다고 한다.